식민지시대의 두얼굴-근대화와 수탈 <山林>
얼마전 일본측의 투고를 보니 구한말 황폐화된 한반도의 산림을 일본의 노력으로 나무를 심고 가꿔 한반도에 숲을 이루게 해주었다는 투고가 올라왔습니다. 사진까지 같이 올려놓았으니 참으로 신뢰를 할만한 투고였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산림을 훼손하고 수탈하였다고 배우는 것일까요?
 
아래의 사진은 일본측에서 근거로 올린 사진입니다. 우측에 성문이 있는 것으로 봐서 동일 장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민둥산에 나루를 심어 울창하게 만들어 놓은 사진입니다. 어쩌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또 다른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7년 무렵 신의주에 모인 나무들]

 

[1930년 무렵 청천강 상류에 모인 나무들]

 

[1920년대 신의주 압록강 하류 목재집적장]

 

뭐 나무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활용하기 좋으니 조선시대에도 그랬지만 벌목을 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일본의 산림정책을 왜 수탈이라고 하는 것일까?

여기서 일본식민지시대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일명 단천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으로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경찰과 주민들 사이에 총격까지 벌어졌으며, 이후 한국의 독립군까지 이곳에 나타나 일본인 순사를 잡아 사건경위를 확인하고 돌아간 사건입니다.

 

[단천사건을 알리는 조선중앙일보 1930년 9월16일자 신문-총독부가 보도통제를 하여 2개월동안 언론에 소개되지 못함]

 

당시 신문에도 자세히 실려있지만 정리를 하면 벌채(採)단속이 너무심하여 이에 항의하던 주민과 면사무소 직원간의 사소한 싸움이 커져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폭력으로 번져가자 40여명을 구속하였으나 상황은 더욱악화되어 결국은 총격이 벌어져 주민 17명이 죽은 사건.

 

자 그럼 도대체 주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던 벌채(採)단속이란 무엇인가?

 

서론이 많이 길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세도가가 산림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산의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말그대로 산은 모두의 것이며, 산에서 생산되는 산물은 채취자의 몫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해석 "산림과 물을 백성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기본이다"라는 말을 따른 것입니다.(단, 산에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점유하는 것은 인정하고 있음) 하지만 조선말기에 이르러 점차 산은 개인소유화되어갔고, 점차 복잡해지는 소유권문제가 불거지자 한일병합을 앞두고 일본은 임야조사사업을 하게됩니다.

 

[임야조사측량 모습]

 

 
[역둔토 조사측량모습 1909년]

 

일본은 1908년 임야의 소유 및 이용 현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산림법>을 발표합니다. 산림법 제 19조에는 "삼림 산야의 소유자는 본법 시행일로부터 3개년이내에 지적도 및 면적의 약도를 첨부하여 농상공부 대신에게 신고하되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아니한 것은 모두 국유로 간주한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한국인 임야 소유자들은 1911년까지 지적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그 신고 실적이 부진하여 전체 임야 1,600만 정보(-1步는 약 3,000평임) 가운데 220만 정보()만 신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는 산림법 공포후 신고자들에게는 엄청난 세금이 부가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에게 모두 산의 소유가 인정된 것도 아니었음. 소유를 위한 조건이 매우 까다로왔음) 이로인하여 전체 임야인 1,600정보()중 180만 정보()만 사유지로 인정받고 나머지는 국유지로  편입됩니다.

 

하지마 국유지로 편입된 임야는 산업용 목재가 아주 적었기에 가치가 떨어졌습니다. 이후 日帝는 꾸준히 임야를 원래의 연고자에게 되돌려줍니다. 조선총독부는 전체 산림중 47.6%가 원래부터 소유자가 존재하는 사유지로 규정짓고 사유림으로 여겨지는 땅을 대부(付)와 양여(與)의 형식으로 연고자에게 넘겼다. 하지만 전체 산림중에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등 산업용목재로 가치가 높은 울창한 산림지역은 요존국유림으로 구분하여 개인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1939년 무렵 馬耳山에서의 벌목현장]

 

 
[압록강 상류의 북부 국경지대에서의 벌목]

 

 

그런데 문제는 개인에게 소유권을 넘겨준 산림에 대한 日帝의 식림(植林)의 방법으로 땅의 주인에게 강제로 식목(植木) 비용을 거두어 들였다는 것입니다. 관청에 정기적으로 묘목 구입 대금을 납부하고, 나무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일본인 관리들이 묘목판매상들과 결탁하여 불량묘목을 공급하므로써 실제로 나무가 울창해진 경우는 흔치 않았습니다. 부패한 관리들로 인하여 植林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조선총독부는 아예 다시 임야 소유 현황을 파악하고 사유지를 대폭 늘리는 방침을 채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1917년부터 시행된 임야조사사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삼림법> 시행초기 180만 정보()에 머무르던 사유림 면적은 1925년에 660만 6,000여 정보()에 육박하였고, 1933년에는 1,000만 정보()를 훌쩍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아예 1926년 4월에 이르러 <특별연고삼림양여령>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임야조사사업 당시에도 미처 사유지로 인정받지 못한 곳을 모조리 사유지로 되돌려주겠다는 의사를 발표했으며 실제로 대부분 무상으로 양여되었습니다.

 

  

[함경남도 갑산의 나무 운반사진]

 

[강을 따라 내려온 목재를 해체하는 장면-대동강 하류]

 

 

참으로 대단한 조선총독부입니다. 조선의 임야를 조선인들에게 모두 나눠주다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그럼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에 대한 그 속내를 알아보겠습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국인의 농법은 조악하여 원래부터 쌀 생산량이 적은데, 게다가 하천 범람이 잦아 매년 흉작이 반복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이 같은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임야 소유자들에게 식목의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그로인하여 임야 연고자들은 매년 엄청난 액수의 묘목 구입비, 식목비를 납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편 총독부는 전국에 배치한 헌병과 관리들의 급여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 부심하고 있었는데, 그 돈을 임야소유자들에게 강제 징수하는 방침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임야조사사업을 거쳐 소유권을 인정받은 임야 소유자들에게 각종 명목의 잡세를 부과한 후 이를 식민지 관리들의 급여 재원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산에서 일제는 국유지를 대폭 줄여나가고 임야의 연고자들에게 원래의 소유권을 돌려주는 방침을 취했습니다.

 

총둑부는 치수·치산 사업을 벌인다면서 임야 소유자들로 하여금 자기 임야에 들어가 장작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는 한편 매년 특정 기일을 정해 입산을 허용하고 입산세를 거두어들입니다. 총독부는 임야세, 입산세 외에도 지게를 들고 장작을 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지게 1개당 얼마’라는 식으로 ‘지게세’라는 세금을 강제 징수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임야의 소유주들은 자신의 산을 판매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을 알면서 산을 구입할 사람을 없을테니깐요. 이러한 속사정이 상기에 언급된 '단천사건'의 전말이 됩니다.

 

 

 
[馬耳山 '봉파'에서 부터 함경북도 종성군 朱乙驛까지 약 32Km의 철도는 오로지 목재수송을 위하여 부설되었음]

 

 
[겨울의 벌목은 소에 썰매를 매달아서 운반]

 

 
[모인 나무들은 노동자들에 의하여 잘린다-압록강 하구의 풍경]

 

 
[압록강변 뗏목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

 

그렇지만 산에서 벌목이 금지된 것은 한국인에게만  한정되었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907년 3월 일본은 법률 제24호로 ‘한국삼림특별회계법’을 공포하여 한국 정부와의 공동출자 형식으로 한국 내 삼림자원 수탈을 위한 재정을 마련한 다음 압록강, 두만강 연안 삼림지대에서 벌채사업을 시작합니다. 일본은 한일 합방 이후에도 이들 지역의 삼림자원을 관리하기 위하여 영림서를 두고 산하 57개 벌목장에서 ‘관행작벌(官行斫伐)’이라는 이름하에 매년 약 130만 ㎥에 달하는 막대한 목재를 베어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관행작벌’이라는 것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산업용으로 쓸 만한 목재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곳은 한국인들의 원래 주인을 찾아 돌려주고 세금을 부가하였던 것이지요.
 
 
[신의주에 있었던 王子製紙工場으로 함경도의 北鮮化學製紙工場과 吉州의 吉州펄프와 더불어 북부지역 산림을 황폐화시키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해주셨다]

 

[北鮮化學製紙工場-1935년4월 일본 三井 회사가 당시 2천만圓의 자본으로 함경북도 회령에 세운 공장]

 

 
 

 

 

 

 

 

by 지구호 | 2010/11/15 10:01 | 한일간역사문제 | 트랙백 | 덧글(1)
식민지시대의 두얼굴-<근대식교육기관-學校>

근대식 교육기관인 학교의 설립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측은 아주 발광을 합니다.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근대식교육기관이라고는 거의 전무한(1910년 합방당시 겨우 100개의 학교가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반도에 학교를 세워주고 교육시켜주어 후일 한국이 해방이후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맞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식민지시대에는 학교가 많이 세워졌었지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땅에 많은 학교를 세워준 일본에 감사를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 이전에 대한제국은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할 의지 자체가 전혀 없었을 까요? 그래도 세계적으로 교육열하면 일본도 앞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현재의 한국인데...

그래서 조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일본이 세워준 학교에 감사를 해야겠지만 이왕 감사를 할려면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좋겠지요?

 

I.B.비숍은 [1897년 10월 현재 정부의 국어학교, 영어학교, 외국어학교, 기독교계통의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언제인가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킬 것이며 몇년안에 대도시에 중등학교나 고등학교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골에서도 모국어로 쓰여진 똑같은 교과서를 사용하는 초등학교가 설립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록만을 보더라도 1897년 전후로 많은 학교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조금 뒤의 기록이지만 H.B.헐버트의 기록도 유사한 점이 보입니다. [서울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및 중국어를 가르치는 중요한 외국어 학교들이 많이 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한국에 관한 고급학문 이외에도 화학, 물리학, 식물학, 생리학, 일반역사, 지리학, 산술, 대수, 기하를 가르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H.B.헐버트의 사진]

 

학교들이 적지 않았던듯 하지요? 그렇습니다. I.B.비숍의 기록을 근거로 1896년 해외선교회의 지원받아 세워진 미션학교의 수는 41개로

주간학교 : 미국북장로선교회(7개교), 미국북감리교 선교회(4개교), 파리외방선교회(21개교)

소년기숙학교 : 미국북장로선교회(1개교), 호주장로선교회(1개교), 미국북감리교선교회(1개교), 파리외방선교회(2개교)

소녀기숙학교 : 미국북장로선교회(1개교), 호주장로선교회(1개교), 미국북감리교선교회(1개교), 파리외방선교회(1개교)

가 이미 한국에 세워진 것으로 나오며, 이후 꾸준히 늘어나 1910년 '한일병합'의 해에 한국에는 관공립 학교 81개교, 준공립학교 65개교에 민중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사립학교는 2,250개교, 그중 미션계가 833개교가 있었습니다.  

 

 

[사립신성여학교]

 

1883년 함경도 원산에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한국에는 서구 근대사상 및 교육을 배우기 위하여 많은 수의 학교들이 설립됩니다.   

 

[1905~1910년의 교과서]

[1906년 중등 수신 교과서]

 

이에 조선(대한제국) 정부도 근대식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제도를 개선합니다.

1882년. 양반의 상업종사와 常民(상민)의 학교입학을 허락.

1887년.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

1894년. 학부아문 설치. 학부아문 관제개정 및 증보군국기무처 소학교 교과서 학부아문에서 편찬케 함.

1895년. 학교설립과 인재양성에 관한 조칙 반포 / 학부관제 공포 / 한성사범학교관제 공포 / 법부양성소 입학시험 실시 / 외국어학교관제 공포 / 소학교령 공포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소학교 규칙 공포

1897년. 독립협회, 제1회 토론회 개최(주제 : 조선의 급선무는 교육)

1899년. 의학교관제 공포 / 중학교관제(전문 17조) 공포, 시행(근대적 중등교육제도의 출발) / 상공학교관제 공포, 시행

1900년. 사립학교규칙 공포 / 외국어학교규칙 공포 / 중학교규칙 공포

1903년. 법부, 법률학교 설립

1904년. 학부,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상을 도우소서’를 각 학교에 반포 / 법관양성소관제 / 국민교육회 설립 

1905년 이후 부터는 통감정치 시대이니 빼는 것이 좋겠지요?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식교육에 아주 많이 신경썼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 A.H 새비지-랜도어, 1895] 

 

[김포양천초등학교 전경-1903년-현재는 서울입니다.] 

[서울광희초등학교 1회 졸업-1908년]

 

그런데 학교의 증가만으로는 한국인의 교육열에 대한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는데, 그로인하여 새로 생성되는 것이 개량형 서당입니다. 개량형 서당은 전근대적인 서당의 변화된 모습으로 지방의 시골에서까지 근대식 교육이 보급되는데 한 몫을 합니다. 1918년 통계로 보면 서당의 증가율은 아주 높아서 약 24,000개의 서당에 26만명의 아동이 다녔습니다.

뭐 서당이야 학교가 아니니깐 그냥 무시할까요? 그런데 그냥 무시해도 되는 서당에 대하여 식민지정부는 모종의 조치를 취합니다.

1911년 사립학교령, 사립학교규칙을 반포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규제와 사립학교를 철폐한 조선총독부는 1919년 서당규칙을 발표하여 서당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개량형서당- 1936년의 사진으로 서당규칙 이후에도 정리되지 않은 듯]

 

사립학교의 경우를 다시보면 1911년 사립학교규칙이 발표되면서 100여개의 미션학교가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C.W.캔달은 1919년 [한국에는 360개의 기독교계 학교와 수백 개의 사립학교]가 있다고 기록하므로써 이미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폐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계열의 미션 학교들은 1911년 105인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탄압을 당했다고 당시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본다면 사립학교는 줄어들었지만, 국공립 학교는 증가를 합니다.  

C.W.캔달의 기록중 1917년 조선총독의 보고서에 나타난 통계 

 

한국인을 위한 학교 : 보통학교/소학교(441개교/81,845명), 고등보통학교(7개교/1,791명), 초등농업학교/상업학교/공업학교(74개교/2,029명), 법률학교(1개교/138명), 의학교(1개교/253명), 공업학교(1개교/282명), 농업학교(1개교/72명)

 

일본인을 위한 학교 : 소학교(342개교/37,911명), 중학교(3개교/1,478명), 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10개교/1,648명), 상업전문학교(7개교/899명), 동척의 식민학교(1개교/18명), 사립상업/기술학교(4개교/513명)  

 

역시 학교가 많이 세워졌군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식민지시대 세워진 학교를 축복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C.W.캔달은 1,668만 4,129명의 한국인중 총 526개교, 86,410명의 학생이 있으며,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의 경우는 320,938명의 일본인중 총 367개교, 42,467명의 학생으로 교육의 혜택에서 한국인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기에도 언급이 되어 있듯이 한일합방 이전 H.B.헐버트의 기록에는 [한국에 관한 고급학문 이외에도 화학, 물리학, 식물학, 생리학, 일반역사, 지리학, 산술, 대수, 기하를 가르친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C.W.캔달의 기록에는 [한국의 학생은 예술, 과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및 공학을 가르치는 상급학교에 자유로이 진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합방이후 한국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질이 떨어진 것입니다.  

 

또한 I.B.비숍과 H.B.헐버트는 한일합방 이전 우수한 한국의 학생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교육을 받고 오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지만, 합방 이후 한국의 학생들은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서구교육이나 현대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것이 절대 금지되어 있다.-C.W.캔달, 1919], [교사들은 특수 기관에서 연수를 받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거의 전원이 해외로 파견된다. 언어를 위하여는 영국으로, 의학을 위하여는 독일로, 법학을 위하여는 프랑스로 떠난다. 그러나 조선사람이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한 특권은 실제로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다.-H.B.드레이크, 1930]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교육 받는 것은 금지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대총독인 데라우치 시대의 한국인에 대한 교육 사정을 C.W.캔달은 [불온한 사상을 조장하는 한도가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되는 서구학문은 어느면이든 간에 금지되거나 본질이 제거된채 교수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내용을 담은 전설이나 동요나 민담을 들려주려하다가는 투옥, 고문, 추방 또는 그보다 더 심한 어떤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일본어로 그들의 한국인 선생들에게 인사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법정에서도 판사는 일본인이고 모든 절차는 일본어로 진행된다. 그 결과 재판의 공식 통역도 또한 항상 불충분하여 한국의 소송관계자들은 대체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기록합니다.  

 

[식민지시대의 교과서]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시대 내내 이어져 1930년무렵 한국에 들어와 교사를 했었던 H.B.드레이크 또한 [아직까지 일본어를 말하지 못하는 조선 어린이들이 다니는 소위 보통학교(Common School)를 제외하고는 수업은 일본어로 이루어진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시험을 쳐서 입학한다. 입학의 문은 '모국어를 말할 수 있는' 학생에게만 열려있다. 그러나 조선의 국어는 일본어이다], [국가의 영예를 손상시키는 일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의에 근거해서 일본의 역사가 교육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왜곡된 역사는 정부를 선전하는데 효율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내가 방문했던 미국선교학교의 교장은 학교 인가의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다른 선교사 교육자들도 같은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계속해서 인가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로인해 학교는 존립근거를 잃고... -중략- 학생들은 학교를 떠날것이다.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사소한 규약을 지키는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전부의 교수 요목을 따르고 부대시설의 설치 또한 기준을 지켜야만 하며 교사의 비율을 준수해서 일정하게 일본인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그 일본인들이 역사와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일본이 주도면밀하게 삭제한 역사는 과학적 연구의 검증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식민지시대 한국에서의 교육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by 지구호 | 2010/11/15 10:00 | 한일간역사문제 | 트랙백(1) | 덧글(0)
100여년전 조선의 모습-이사벨라 비숍의 기록 인용
100여년 전 한국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여사의 글을 참으로 많이들 인용을 합니다. 인용하고 있는 이사벨라 비숍의 글의 내용만을 보면 한일합방 이전의 조선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고 비위생적이며, 더러운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벨라 비숍말고 다른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금 다른 평가가 있습니다. 미국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서울은 일본의 동경이나 중국의 북경보다 훨씬 깨끗한 도시라고 평가를 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상이한 평가를 하게끔 하였을 까요? 그것은 바로 년도의 차이입니다.
 
이사벨라 비숍은 1894년 1월 조선을 처음 방문합니다. 이후 1897년까지 4차례 방문을 합니다.
 
 
 <1890년대의 서울의 모습-일부 다른 자료에는 1902년 사진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명칭이나 설명을 보면 1890년대가 맞을 듯 함>
 
그녀가 처음 방문을 했었던 1894년의 서울은
... [내가 북경을 보기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생각했고 소흥(紹興-중국의 상업도시)을 가보기 전까지는 서울의 냄새가 가장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중략... 길은 좁으며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를 겨우 끌고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이다. 그 길은 그나마 물구덩이와 초록색의 오수가 흐르는 하수도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불결함과 악취나는 하수도는...]

아마도 이사벨라 비숍이 처음 접한 조선의 모습은 그녀 스스로가 표현하고 있듯이 혐오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1895년 서울 서소문거리>


위의 사진과 같이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대로 하수도의 덮개가 없는 도랑식의 하수도가 당시 서울에 악취를 풍기고 있었으며, 매우 비위생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인정합니다. 아마도 실제로 그랬을것입니다. 굳이 나폴레옹 이전의 파리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근대화 이전의 서울 모습을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이러한 더러운 모습은 일본과의 한일합방이 되어서야 변화가 되었을 까요? 실제로 일본측에서는 그와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럽고 비위생적인 한국이 한일합방을 계기로 위생적이게 되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이사벨라 비숍이 처음 방문을 했었던 1894년을 벗어나 볼까요?

1896년 서울이 변합니다. 서울도시개조사업을 벌이는데, 1896년 7월 [철도규칙6개조]가 공시된 이후 1896년 9월 30일 [한성의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이라는 내부령이 발표되면서 본격화 됩니다. 이후 고종은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때의 개혁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합니다.

 

<서울도시개조사업 이전의 사진으로 동대문에서 종로쪽을 바라본 사진>

<상기 사진과 동일의 위치에서 찍은 사진으로 서울도시개조사업 이후의 사진이다.>

 


<1900년경의 광화문 일대의 사진-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가 찍은 사진으로 실제로는 1902~1903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다. 아래 두장의 사진도 카를로 로제티가 찍은 사진임>

<1900년경의 남대문로 일대의 사진>

 


<1900년경의 종로2가 일대의 사진>


<1900년경의 동대문 사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15년 서대문이 없어지게 되므로 그 이전의 사진으로 보인다.>

이사벨라 비숍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896년 10월이며, 1897년 초겨울 조선을 떠납니다. 즉, 그녀는 [광무개혁-光武改革]에 의한 서울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성판윤(서울 市長)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 해관총세무사가 환경과 위생의 개선을 위해 괄목할 만한 과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서울은 외국인들이 털어 놓는 불평을 해소하게 될 것이다] 

 ...[서울은 여러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방향으로는 너무 변하여 옛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좁은 길은 넓혀지고, 진흙의 개울은 포장되었으며 도로는 더 이상 쓰레기를 자유롭게 버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지저분했던 서울은 이제 극동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이 기록은 마치 헐버트의 기록과 아주 동일하지요? 

 ...[좁은 길을 넓히고 굽은 길을 바로 만들고 자갈을 깔았으며 돌로된 도랑이 길가를 따라서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때때로 주민들에 의하여서 자발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작업과 더불어 서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극적이고 독특한 냄새는 사라졌다. 위생규정이 발효되었으며... 중략... 서울 거리는 너무 변하여 1894년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찍어둔 대표적인 빈민촌의 모습이 쓸모없게 되었다.]

이사벨라 비숍은 서울의 변화되는 모습을 반복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에는 근면하고 호의적인 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에 대하여 
 ...[이제 조선을 떠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처음 조선에서 느꼈던 혐오감은 애정에 가까운 관심으로 바뀌었다]라고 하면서 조선을 떠납니다.

조선의 모습을 비난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의 뒷 쪽에는 이와 같은 기록들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어떨때는 일본측에서 조선의 혐오스러운 첫인상만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책을 전체 읽은 것이 아니라 웹등에서 일부만을 읽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전체의 내용을 다 읽었다면 조선은 더러운 국가였고, 한일병합으로 인하여 깨끗해졌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었을 텐데... 아니면 책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을 까요? 그것이 바로 왜곡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by 지구호 | 2010/02/08 22:25 | 트랙백 | 덧글(0)
인조이재팬> 사이고다카모리의 征韓論? 遣韓論?

오래간만에 흥미있는 주제가 나온 것 같습니다.

 

elseorand씨가 serra씨의 쓰레에 별도의 쓰레까지 세워서 사이고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견한론(遣韓論)인 듯합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1837~1919)가 1개 대대의 파견을 주장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7 ~ 1877)는 자신이 사절로 가서 회담을 하겠다고 주장을 합니다. 뭐 결론은 사절을 먼저 파견하고 '조선이 틀림없이 사절(使節)을 폭살할 것이니, 그것을 명분으로 군사를 파견하면 된다는 주장이며, 이러한 상황은 1978년까지 사이고다카모리가 정한론자라고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사카(大阪) 시립대 명예교수인 모리도시히코(毛利敏彦)는 [메이지6년 정변연구,1978]에서 사이고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제창했다는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평화적 사절 파견자였다는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모리도시히코(毛利敏彦)는 사이고다카모리는 사절의 파견만을 주장한 것이며, 뒤에 이야기를 하는 사절의 폭살후 군대를 파견하자고 하는 것은 강경파인 이타가키를 설득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사이고다카모리는 평화적인 사절의 파견만을 주장하였지만, 강경파 때문에 사절을 파견하고서 사절이 죽게될 것이 뻔하니 이후에 군대를 파견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이고다카모리가 정한론자(征韓論)라면 사절을 파견하자는 것은 군사적인 도발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 되는 것이며, 견한론자(遣韓論)라면 군대의 파병은 이타가키다이스케를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인 발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판 거주자들은 어느쪽인 것 같습니까? 征韓論? 遣韓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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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4nnn 08-04 23:22      
미안.좋은 스레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하고 모르는 것이야. 
 
     jigooho 08-04 23:26    
아~ 올해 초에 일본의 교과서에도 征韓論과 遣韓論 양론이 모두 게시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역시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것인가???    
 
    t4nnn 08-04 23:31      
통설에서는 국내 사족의 신정부에의 불만의 배출구를 「정한론」에 요구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모일 자세를 바꾸지 않는 조선 정부에 싸움을 거는 것이 모두에 앞뒤가 맞는 발상이었다) 자세한 배경은 복잡하고 잘 모른다. 

     t4nnn 08-04 23:32    
현재의 노·무홀 정권의 「반일」과 같은 도리군요.ww 
 
    t4nnn 08-04 23:41      
당시의 메이지 일본 정부는 돈이 없었고 정한론에서는 전쟁(정한)을 끝내는(강화에 반입한다) 이치가 완전히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jigooho 08-04 23:45    
    orz...    

    elseorand 08-05 00:23      
당사자로서 한마디.serra30가 낸 사료로부터, 어떻게 서향은 조선에 출병 하고 싶어하고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인가 w 또 1873년의 시점에서는, 사이고가 실시하면 살해당하는 것은, 비현실적.강화도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한국측에서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원인은, 한국측의 변변치 않고 어리석고 못난 교섭 지체 행위인 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퍼진 채로일 것이다. 그것과 그 교섭 지체의 원인이, 민비와 대원군의 분쟁이 원인이기도 하고, 조선측의 내정의 자멸이 외교에 악영향을 미친 지극히 바보같은 사례로서 제시하는 것이 「정한론과 견한론」의 대비보다 재미있는데. 

     elseorand 08-05 00:35    
    이제(벌써) 한마디 이언 더하면, 조선측의 지체 행위나 그 외의 불성실한 행위가 많이 있어, 일본이 전쟁했을 뿐이라면 대의등 이미 충분히 있던 함정. 뭐서향과 판자 울타리로 방법론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두 사람 모두 「이 시점에서의 결착」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공통. 그러나 오오쿠보 도시미치 근처는, 「결착을 바라지 않고 한층 더 실무자 레벨로의 교섭」이라고 하는 결착을 피하는 형태를 취했다.이 차위 쪽이 외교를 보는데 있어서 재미있다. 뭐, 국서 수취가 1875년에 「일본의 국기 견본을 현장의 병사에 전달하지 않았으니까, 조선 병사가 오발해 사건으로 발전한 강화도 사건」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결착을 청구서 하고 싶어하는 심정만은 이해 성과는 하지 않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jigooho 08-05 00:29    
    괜찮다면 조금 이어 받겠습니다.    

     jigooho 08-05 00:28    
    그 부분은 과거 tooo씨와 잠시 논의가 있었던 부분이군요. ^^    

    jigooho 08-05 00:33      
우선 일본이 조선에 보낸 서계의 형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잘알고 있을 것입니다.
1. 대마도 宗氏의 관위가 조선에 전혀 통보가 없이 변경(폐번치현으로 인하여)되었다는 것이 첫번째 입니다.
2. 황(皇)과 칙(勅)등의 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두번째 문제이지요.
3. 조선에 대한 경칭이 대인(大人)에서 공(公)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 세번째 문제입니다.

문제는 조선이 이러한 서계를 인정하게 되었을 때 조선의 건국초부터의 외교방식인 교린관계가 깨진다는데 있습니다.   
 

     jigooho 08-05 00:34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이웃국가인 일본과 여진등에 대등한 관계를 갖고자 노력을 하였으나 일본의 천황제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여러곳에서 발견이 됩니다.    

   jigooho 08-05 00:38      
과거 나의 쓰레에서도 잠시 언급이 되었듯이
한국어 : http://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history&nid=1809434&st=writer_id&sw=jigooho
일본어 : http://bbs.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thistory&nid=1809434
조선은 일본에 천황(天皇)이 복권(復權) 되었을 때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elseorand 08-05 00:43    
     jigooho 08-05 00:42 >>그러한 화이질서적인 이야기는, 교섭 담당자의 거짓말의 측면이 강해 별로 의미 없으니까. 
 
     jigooho 08-05 00:42    
    특히 18세기 실학자인 이익(李瀷)은 일본에 천황(天皇)은 꼭 복권(復權)될것이라고 주장을 하였으며, 그의 제자는 일본의 천황(天皇)이 복권(復權)을 하도록 조선이 나서야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에서 천황(天皇)은 복권(復權)을 하였고, 그에 대하여 조선은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어쩌면 사이고다카모리가 사절로 조선에 파견되면 조선이 살해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을 당시의 일본측도 잘알고 있었다고 봐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elseorand 08-05 00:39      
jigooho>>일본측이 에도시대의 문장을 꺼내 와 「에도시대와 같은 문면인데, 조선은 받아 거부란 왜야?」라고 다가서면, 교섭 담당자가 「병」이라고 해 도망쳤습니다. 그것과 한국측에는 사료가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만, 조선의 교섭 담당 공무원의 현석운이 「전임자와 같이 살해당하는 것은 싫기 때문에, 자신 개인이 거짓말을 토하고 교섭을 늘렸다」라고 일본 측에 자백하고 있기 때문에, jigooho 08-05 00:33 의 이야기는 현석운의 개인의 거짓말의 측면도 강하다. 
 
   elseorand 08-05 00:42      
jigooho >>현석운에 관해서는 강화도 사건의 처리때의 오경석도, 여러가지 푸념을 말하기 때문에 조사해 보면 좋다.그 푸념이 실려 있는 일본측의 사료는, 이미 여기 NAVER로 등장이 끝난 상태. 
 
   elseorand 08-05 00:45      
jigooho 08-05 00:42 >>조선측의 교섭 담당자는, 오로지 도망치는 것만으로 교섭하지 않았다.그것을 모리야마 시게루 근처도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측이 죽이러 오다는 일본측의 누가 생각한다인가 w 
 
   jigooho 08-05 00:50      
elseorand > 실무담당자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가 있지만, 중요한 부분은 1869년 미야모토고이치의 <조선론>에서도 일본이 皇을 칭하는 것은 조선을 臣隸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적고 있으므로, 조선은 일본의 서계 접수를 대원군과 명성황후사이의 내부갈등보다는 일본과의 국제관계에 대한 재정립 때문에 시간을 끌었다고 봐야합니다.    
 
     elseorand 08-05 00:54    
    정보가 부족하다. 대원군측은 훈도에 압력을 가하고, 교섭을 지체.민비측의 고종은 일본에 대해서 접근하기 위해서, 사자에 편지를 갖게해 오거나와 「국제 관계」는 훌륭한 것을 조선 정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단순한 조선측의 살인의 힘관계로 교섭이 변화했을 뿐입니다만. 
 
   elseorand 08-05 00:57      
jigooho 08-05 00:50 >>조선 정부가 「국제 관계에 대한 재확립을 위해 시간을 들였다」라고 주장한다면, 승정원일기 근처에 무엇인가 정보라도 있는 거야? 현석운의 전임자는, 대원군의 세력이 떨어졌을 때에 「일본이라는 교섭에 실패했다」라고 하는 것으로 사형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단순한 당쟁이겠지. 
 
   jigooho 08-05 01:01      
elseorand 08-05 00:43> 번역이 원활하지 못한 것일까? 天皇復權에 대한 대처방안은 존왕양이보다 100년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특히 그 제자라는 사람은 조선에서 次官補정도의 고위직이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대부분의 조선관료들은 일본의 天皇復權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했다고 볼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즉, 일본의 서계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선내부의 정치적 갈등 및 실무 담당자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과 일본간의 관계에서 서열문제가 발생하는 것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elseorand 08-05 01:08      
jigooho 08-05 01:01>>대원군이, 명확하게 교섭을 늦추어 받을 수 있어이지만 w 실제, 현석운근처는 중앙에의 보고도 하지 않고 , 마음대로 행동하고 교섭을 늦춘 것을, 오경석이 일본측의 앞에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elseorand 08-05 01:11      
jigooho>>기본, 조선은 「당쟁이라고 하는 살인」의 힘관계의 변화로, 임기응변적으로 정책이 변동하는 것이, 병합까지 계속 된 것만으로 w 실제 이 때도, 대원군의 영향을 받은 훈도가, 중앙에 보고도 하지 않고 , 마음대로 교섭해 늦추었을 뿐. 훈도의 현석운의 경우는, 일본 측에 자백까지 하고 있다.  

     jigooho 08-05 01:20    
    ^^ 그러니깐 玄昔運 개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일본의 서계가 늦게 전달이 되었고, 그로인하여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시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문제의 핵심은 皇과 勅이었지 다른 부분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실제로 일본은 皇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은 맞지 않습니까? 물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인지하고 외교적인 대처를 빠르게 하지 못한 조선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皇이라는 글자로 인하여 조선은 거부를 하였던 것이 맞는 듯 하군요...    

     elseorand 08-05 01:24    
    jigooho 08-05 01:20 >>일본의 1차의 정한론은, 조선측의 무례한 행위에 의해서 분위기가 살았던 것.에도시대에 「황과 칙」을 사용하고 있던 것을, 나타내 보여 논파하면, 조선측은 「병이다」라고 해 도망한 것처럼, 문자의 문제는 단순한 지체 전술의 하나. 
 
     elseorand 08-05 01:26    
     jigooho 08-05 01:20 >>에도시대에 일본이, 「황」이나 「칙」같은 화이질서에 관련되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어도, 조선측이 문제삼지 않았는데 , 메이지가 되고 나서 갑자기 문제삼은 것은 왜? 즉 단순한 「구실」, 실질의 문제는 아니다. 
 
   elseorand 08-05 01:17      
1874년 9월에 민비측의 고종이 왼쪽 장군조녕하를 사나라고 편지를 갖게했지만, 편지 중(안)에서 조정의 의향으로서 교섭이 단절하고 있었던 것에 유감의 뜻을 나타내, 일본의 문자도 그 수정안도 받아 들이는, 일본이 구체제를 개정하고 신체제를 지은 그 경위도 알고 싶으면 일본의 유신·개화의 평가조차 방문하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과의 국제 관계의 재확립에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고, 단지 대원군측의 방해가 만났을 뿐. 올바르게 당쟁 w 민비측에서는 대답은 이미 명료하게 나와 있었어요. 
 
   jigooho 08-05 01:30      
elseorand 08-05 01:24 >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교섭을 하기 위하여 보낸 서계에는 왜 조선에 보낸 서계에 들어있었던 皇이라는 글자가 빠져있었던 것입니까?    
 
     elseorand 08-05 01:33    
    어느 문장에 「황」이라고 하는 문자가 없었던 것일까 불명하기 때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다. 
 
     jigooho 08-05 01:34    
    일본이 진심으로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政府對等論을 취할 생각이 있었다면 천황이라는 글자를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이 글자가 문제가 될것이라는 것을 일본정부는 몰랐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elseorand 08-05 01:37    
    jigooho 08-05 01:34 >>반복하지만, 몇 시의 어느 문장에 「황」이 없었던 것일까 정보가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다. 
 
     jigooho 08-05 01:37    
    elseorand 08-05 01:33 > 요시오카히로기가 지니고 있었던 외무성의 서계의 원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청나라에 보낸 서계에 문제가 될만한 皇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일본 정부 스스로 政府對等論이라고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는 것도...    
 
     jigooho 08-05 01:40    
    elseorand 08-05 01:37 > 아니 거꾸로 청나라와의 교섭시 일본이 皇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내가 틀린 것입니다. orz...    
 
   elseorand 08-05 01:43      
jigooho 08-05 01:40 >>청일 전쟁의 선전의 조서라든지 일본의 천황의 의미로 「황」이라고등장합니다만. 원래 「황」은 일본왕이 발할 때 밖에 사용하지 않으니까, 차례는 별로 없다. 

     jigooho 08-05 01:50    
    하지만 청일수호조규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일본이 1870년대에 皇이라는 글자를 공식적인 외교문서에 사용한다는 것이 동아시아의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조선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고다카모리가 遣韓論者였었다면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도 皇이라는 글자를 빼고 순수하게 政府對等論의 입장에서 접근을 했었다면 강화도사건과 같은 것이 없이도 조선과 일본은 수호조약을 맺을 수가 있었겠지요.    
 
     elseorand 08-05 01:49    
    elseorand 08-05 01:43 이것은 조금 오해를 부른데.정정:역시 그 「Yosioka 히어로기」의 문장의 성격이 불명해서 정말 말할 수 없다.조선에 관해서는, 조선 통신사 시대에 조선 측에 보내는 문서에도 「천조·황조·아손(계급 명칭)」이라고 보통으로 「황」을 사용하고 있어 메이지가 되어 갑자기 문제삼는 것이 이상하다.  
 
     jigooho 08-05 01:53    
    에도시대에 천황은 공식 정부대표자가 아니었으며, 외교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의 천황의 위치는 단순한 제사장의 입장이었을 뿐입니다. 조선은 일본의 천황을 어떻게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위에 언급된 이익(李瀷)의 天皇復權論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elseorand 08-05 01:57    
    jigooho 08-05 01:53 >>조선측은 문자가 나쁘다고 했습니다만? 또 조선 통신사 시대에 조선 측에 보내는 문서에도 「천조·황조·아손(계급 명칭)」이라고 보통으로 「황」을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제시했는데, 「병이다」라고 해 조선측이 도망했습니다만. 너는 상당히 조선 정부를 과대 평가해 있데.일본측에서는 조선 정부의 어리석고 못난 행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공론 등 이상한 것뿐이지만. 
 
   elseorand 08-05 01:54      
그 외, 서열이라든지 서양 문명이라든지, 단순한 구실인 사례. 일본이 서양식의 배로 조선에 가면 「옛 일본식의 배로 와라」라고 한 조선측. 그러나, 강화도 사건 후의 조선수신사가 올 때는 「일본의(서양식의) 배를 빌려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조선측이 요청. 뭐, 정말로 단순한 교섭 지체의 전술입니다, 서열 어째서. 
 
     jigooho 08-05 02:01    
    -.-; 혹시 elseorand씨는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는 모르는 것입니까? 1609년 조약에서 배(船)의 종류에까지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조약을 어겼으니 당연히 조약대로 하라고 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elseorand 08-05 02:09    
    그것 자 「섬주의 것」이라고 있도록(듯이) 대마도 한정의 이야기겠지. 
 
     jigooho 08-05 02:13    
    확실히 기유약조(己酉約條)는 안읽어보셨군요. 國王使에 관한 내용도 포함이 된 조약입니다만... 물론 외교담당은 대마도가 맡아서 했지만 국가간의 조약입니다만...    

     jigooho 08-05 02:15    
    국가간의 조약에서 이전의 조약이 있다면 그대로 지키는 것이 관례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조선이 교섭을 지체하기 위한 전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elseorand 08-05 02:01      
jigooho 08-05 01:53 >>로, 그 훌륭한 탁상 공론이, 이 문자 문제에 파급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흔적은? 승정원일기에 정보라도 있는 거야? 
 
     jigooho 08-05 02:09    
    승정원일기는 후에 찾아보지요. 실록에는 분명히 문서의 양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다시 받으라는 기록과 양식이 맞게 되면 받아도 좋다는 기록이 있으니깐요. 다시 하나 질문을 합니다. 皇이라는 글자가 매우 민감하며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일본정부는 몰랐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elseorand 08-05 02:11    
    jigooho 08-05 02:09>>일본측은 이해 불능이겠지.에도시대는 사용하고 있던 문자가, 갑자기 안된다고 말해 오고, 게다가 끝구에는 「병이다」라고 해 조선측이 도망쳤으니까. 
 
   elseorand 08-05 02:07      
jigooho 08-05 01:50 >>「청일 수호 조약 당시는 「황」이 공식적인 외교 문장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라고 하는 근거는? 
 
     jigooho 08-05 02:10    
    아~ 皇이 공식적으로 사용이 되었었습니까? 전혀 몰랐던 부분입니다.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orz...    
 
     elseorand 08-05 02:12    
    jigooho 08-05 02:10 >>당시 , 청의 속국인 조선에 대해서, 국서에 「황」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이 청에 대해서 「황」을 사용하는지 사용하지 않는지를, 거기까지 신경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elseorand 08-05 02:20      
jigooho >>로 결국의 곳, 일본이라는 교섭이 늦은 것은, 안šœ경이든, 현석운이든, 배척 사상의 대원군을 두려워하는 일이지요. 기본적으로 고종은, 일본 측에 접근하기 위한 편지를 보낸 것이나, 일본이라는 교섭을 늦춘 것으로 안šœ경을 처형한 것등에서, 민비측의 태도는 「일본에의 접근」이라고 하는 것으로 명료하겠지요. 이 두 개의 당쟁 덕분에, 살해당하고 싶지 않은 현석운이 마음대로 교섭을 늦추었다. 이것은 현석운이 일본 측에 자백하고 있고, 오경석도 일본의 앞에서 한탄하고 있다. 
 
     jigooho 08-05 02:25    
    그러니깐 elseorand씨의 결론은 정한론이라는 것은 玄昔運의 잘못으로 생기게된 사건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군요. 玄昔運이라는 사람이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지는 몰랐습니다. 결국은 玄昔運이 서남전쟁의 원흉이로군요...! orz... 늦은 시간까지 감사했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    
 
     elseorand 08-05 02:24    
    또 1873년 당시의 일본은, 교섭이 늦는 조선에 대해서, 국민까지도가 화나 있어 「정한론」이 치솟고 있었다.사이고 다카모리는 결착을 붙이는 의미로, 자신이 사자로 하고 있어 후도 했다. 왜냐하면, 통상의 외교관에서는, 현석운과 같은 하급의 훈도가 방해를 하고 진행되지 않았으니까.그러니까, 서향 클래스가 가면, 조선측도 서투른 지체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 
 
   elseorand 08-05 02:27      
jigooho 08-05 02:25 >>서남 전쟁과는 관계가 없다. 뭐 좋아, 휴업(휴가). 현석운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결국은 당쟁으로 정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이루지 못했던 것. 
 
   jigooho 08-05 02:29      
elseorand 08-05 02:24> 그런데 무엇 때문에 화가나서 정한론으로까지 커졌습니까? 왜그렇게 조선과 빨리 수호조약을 맺고싶어했지요? 이미 조선과는 맺어져있는 조약이 있는데... 서계 제출이 1872년이고 정한론이 대두된 것이 1873년이니깐 1년여만에 조약을 맺고 싶어했던 상대가 정벌을 해야하는 상대로 변했군요... 이해가 안됩니다. 혹시 빨리 조선이 천황을 인정하고 일본의 속국이 되기를 바랬는데 마음대로 안되자 화가난 것입니까?    
 
     elseorand 08-05 17:45    
    뭐라고 하는지, 그 발언으로부터 너무 당시의 일본측을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어디에서 설명하면 좋은가 몰라요 해, 다시 공부하고 와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 
 
     elseorand 08-05 17:58    
    원래 1873년의 시점에서, 조선이 국서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서 5년 경과하고 있다. 
 
   jigooho 08-05 02:34      
elseorand>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서로 부족한 부분은 조금더 찾아보고 보충을 하여 후에 다시한번 즐거운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뭐, serra씨와 논의를 하신다면 즐겁게 구경을 하겠습니다. 갈께요... 꾸벅~    
 
     elseorand 08-05 17:43    
    serra? 그 기능성 문맹, 문장을 오독하고 반론을 하고 오는 바보같기 때문에, 논의 등 성립한 기억이 없지만. 
 
   jigooho 08-05 02:36      
아~ elseorand씨는 사이고다카모리의 주장이 征韓論인지 遣韓論인지에 대하여 묻고싶었는데, 후에 꼭 그 부분에 대하여도 대화를 나누길 희망합니다. ^^    
 
     elseorand 08-05 17:48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인가 「견한론」이라고 하는 2항대립에 의한 이해는 지극히 불충분.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서는 elseorand 08-05 02:20 와 elseorand 08-05 02:24 가 그의 사고를 추측한 결과. 
 
   elseorand 08-05 17:57      
jigooho 08-05 02:15 >>기서약조의 조문을 읽어 주세요. 당신의 발언은 무의미합니다. 
 
   serra30 08-05 21:58      
여기서도 elseo 또 말하고 있군요.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반론도 못하면서 " 문맹 " w
자신에게는 허락되는 출입구, 남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출입구 , 레이블 붙이기입니까? ^ ^
좀 질리는데.k

논의자세는 jigooho님에게 항상 배워야 할듯 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배워야 할 사람은 많지만, jigooho씨나 ochimusha hanmaumy씨 등은 모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serra30 08-05 22:11      
1868년 12월 14일木戶孝允는 1869년 1월 1일 군무관부지사인 大村益次郞에게 서간을 보냈다.내용
木戶는 西鄕에게 정한론이 시기상조라고 말한 인물이다> 일본사람들은 알고 있지?
천하의 각 다이묘들이 메이지유신에서 세운 공명만을 내세워 은상만을 거론하고 있으며 그들 번의 세력과시 막부시대보다 방자하고 황국을 만세유지하자는 논의는 추호도 하지 ㅇ낳고 저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시점이다.따라서 符館의 건이 해결되는 대로 병력을 몰아 韓地 부산으로 향해야한다

serra30 08-04 14:37
문제는 어디 있는지 알까? 12월 14일 , 일본사신이 부산에 와 국서를 보낸지 3일밖에 안된 시점에서, 이런 언급을 한다.미리 정하지 않았다면 3일만에 그런 논의를 할 수 있어? 정상적으로 생각해라.w
 
   serra30 08-05 22:22      
먼저 쓴 리플입니다.하지만 12월 14일, 3일밖에 안되어 있는데 결과 미리 예상> 답안까지 낸 시점에서 , 다시 1875년 2월에 왔을때, 3개월후에 ,,똑같은 요구조건을 일본측에서 하게 됩니다.
또 당시는 大일본 , 皇이란 글자가 똑같이 써 있는 서계를 동래부사에게 보냅니다.

1 협상.실무자로 5회 실패한 .. 森山 茂가 일본정부의 무력행사만이 조선과의 협상을 타결 할 수 있다..<일본외교문서 제 8권 29 메이지 8년 4월 23일
廣律副官 참의서
2.2개월후 4월에 운양호 사건이 일어납니다.일본 군함을 조선근해에 보내죠.운양호가 파견될때의 구실로 해군성이 : 조선 서해와 청국에 이르는 해안을 연구하라..라는 명목으로 보냅니다.
무엇인가? 해군성 자체도, 출동 부대원들에게 양국에 무력행사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리지 않고, 원인도 모르게 명령한 상황..>> 뭐라고 생각합니까? 여러가지 현안 , 정황이 공식적으로 무력행사 개시를 알리기에 충분치 않고, 표면상과 실제의 명분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
즉 조선이 일본으로 하여금, 어떤 무력행사를 할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해군성에 통보하지 않고, 동떨어진, 의미로 출동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serra30 08-05 22:45      
木戶가 즉각적인, 정한론은 안 돼!..라고 말한후
西鄕이 끝내 실각했다고 할지라도,
木戶가 운양호 사건 준비의 실무자고, 무기 군비를 준비하자고 했지만..
else,식의 논리라면, 어느 한 장소에서 " 이건 안돼.. ( a가 아니라) b 가 안돼.." 라고 했다고 해서,
a가 완전히 삭제된단 말인가?..
정한론의 흐름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serra30 08-05 22:59      
마지막으로 묻자..saigo가 정한론자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이상한 말인데, 아무리 정한론도 3가지 정도로 나뉘어도 saigo의 퇴진 이유가 뭔지는, 너무 분명하지 않은가?

岩倉가 뭐라고 하면서 saigo를 퇴진시켜?
征韓의 시기가 아니고 소위 先內治後征韓 : 먼저 내정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한국을 정벌을 강조하겠지?w
saigo가 말한 것은 정한론의 명분을 만들어내겠다는 말일뿐이고,전혀 평화사절이라던가, 침한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그 명분이 자기가 특사로 조선에 가서 의도적으로 모욕하면 자신이 처형될테니까 따라 들어와의 의미일 것이다. 
 
   elseorand 08-06 04:55      
아무튼 뭐라고 하는지, 과연 기능성 문맹의 serra30다. 「독일은 전쟁 범죄(전쟁 법규·관례 위반에 대한 물건)에 대해 국가 배상한 NIDA」라고 하는 증거로 해 이스라엘에 보상한 사례를 내 오는 바보만은 있다. 

     serra30 08-07 18:46    
    주변국에 배상금 지급.:,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에는 별도로 150억 마르크의 배상기금을 출연> + nazi,에 대한 계승을 했기 때문에 ,nazi, 과거의 정부에 대한 배상을 한 것이 현재의 독일 정부. 정말로 모릅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일입니까? , 
 
     elseorand 08-06 04:56    
    위에 인용되고 있는 일도 오인 투성이로, 어쩔 수 없는 (웃음) 
 
   jigooho 08-06 13:05      
그냥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인가 결정을 해야하는 시기에 어떠한 결정을 했었는가를 배워, 우리가 새로운 선택을 해야할 때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냥 흠집을 잡고자하면 어느 곳에서도 잡히지 않는 곳을 없지 않을까요? 과거 tooo씨와도 이번에 elseorand씨와도 일본의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방식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지만, 어차피 청나라와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의 상황이자 숙명이었던 것이 라고 생각이 듭니다.    
 
     serra30 08-07 18:48    
    맞는 얘기입니다. 공부의 목적, 역사를 보는 것은 그런 것이 원래의 자세일것입니다...그런데 솔직히 정한론에 대해서 알면, 관심을 가질수록, 절대 그런 제국주의로서의 발흥아니, 타 국과와 다른 이데올로기가 정한론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 아무리 고민을 하고 봐도, 그 자리입니다..조선의 숙명이라고 하지만, 왜 어째서? 갑자기? 아니면 그 전의 배후가 뭐였길래 정한론이 나와? 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레 흐린것 같아 미안합니다. 
 
   jigooho 08-06 13:10      
serra30 > 일본의 정한론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대마도의 宗氏가문의 조선에 대한 비하(이간질)이 또한 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19세기초반 조선과 대마도와의 무역의 퇴조와 폐번치현의 상황에서 대마도가 일본본토에 더욱가까와지기 위한 하나의 생존 방책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에 관하여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serra30 08-07 18:50    
    대마도도도 대마도이지만, 정한론에 관한 것을 읽으면, 언제나 야마구치현 인사들이 주로 등장하고, 그 야마구치 현은 예전 3왜도로, 조선전기부터, 세종이나 태조때, 진압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부에 야마구치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 이전은 서국의 호족으로 천황제에 충분히 충성하지도 않았는데 , 자신들의 권리 찾기로, 조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좋지 않았다..? 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여기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lseorand 08-09 02:20      
serra30는 변함 없이, 읽을 수 있지 않은 기능성 문맹이구나 w 아직도 나의 문장을 읽을 수 있지 않기 때문에, 빗나간 화살인 일을 환w 

by 지구호 | 2007/09/11 22:55 | 한일간역사문제 | 트랙백 | 덧글(0)
야산 딸기밭 CCTV...!
제가 경남 진주지사에서 잠시 근무를 할 때 입니다.

야산에 딸기밭(복분자인것 같습니다.)을 하시는 분인데, 원래 오랫동안 부산등에서 외지 생활을 하시다가 오신 분이라 지역의 텃세가 있었던듯 합니다. 야간이면 종종 누군가 몰래 밭에 들어와서 새순만 잘라버린다고 하네요. 농사 망치게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CCTV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밭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집에서 모니터로 감시하고 녹화도 하는 것이지요.

초반에 카메라 선정하는데 고생을 했습니다. 당시는 아직 적외선 카메라가 흔하지 않았던 때라서 저조도카메라를 설치했었다가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하여 결국은 적외선카메라로 설치했습니다. 또한 야간에 적외선 빔을 보고 몰려든 벌레들 때문에 카메라 영상에 링현상이 생기는 것도 카메라 제조업체등과 협의등을 하여서 잡았습니다. 적외선 카메라의 링현상은 이 공사때문에 최초로 해결을 하게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부터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선 집과 밭과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밭에는 물론 전기 시설도 없고, 카메라를 거치할 만한 구조물도 없습니다.

우선 카메라는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48IR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48IR이라면 대략 20~30미터까지 적외선 빔이 나갑니다. 멀리는 50미터도 가능하지만 사람 구분이 거의 안되기 때문에 IR수 나누기 2정도로 계산을 하면 좋더군요.
카메라의 해상도는 41만화소이며, 링현상을 없애기 위하여 보강조치가 되어 있습니다.(요즘의 카메라는 기본으로 다 되지만)

녹화기는 PC 타입 DVR이며, 인터넷을 통한 원격 감시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공사는 배선을 5C-2V동축 케이블을 사용하였고, 전기는 밭 앞에 있는 논까지는 한전에서 세워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밭의 두군데에 POLE을 세웠습니다.




POLE의 고정은 직접 땅을 파서 공구리 작업을 했으며, 와이어로 몇군데 고정을 하였습니다. POLE은 벼락이 칠 것을 대비하여 피래침역활을 할 수 있는 지름 2센티짜리 구리 봉이 있는 것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POLE을 설치하자 한전에서 와서 POLE까지 전원을 넣어주더라고요. 배전함에 카메라 아답타등을 넣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사진으로 보니 밭에서 집까지 거리가 500미터는 되어 보이네요.

테스트를 하는 중에 찍은 사진이라서 영상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네요.

by 지구호 | 2007/08/25 22:03 | 그외의 지식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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